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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중세의 '약속'에서 현대의 '합의'로: 영국 계약법 Contract 의 역사적 진화 과정

by 영국유학생감정 2025.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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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계약법은 성문법이 아닌 판례법 즉 커먼 로를 근간으로 하고 있어 그 발전 과정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사용하는 Contract 라는 단어는 처음부터 현대적인 법적 구속력을 가진 약속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중세 시대에는 단순한 약속이나 합의보다는, 이미 발생한 채무 관계나 불법 행위로부터 파생된 의무를 다루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Contract 가 현대적인 의미의 법적 개념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수백 년의 법적 논쟁과 수많은 판례들이 필요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영국 계약법의 핵심 요소인 Contract 라는 개념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그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초기 영국 법체계에서 Contract 라는 개념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법적 틀은 미비했습니다. 대신 재산권의 침해나 폭력과 같은 불법 행위를 다루는 불법 행위법 Tort law 에서 파생된 소송 형태인 Writs of Trespass 와 Writs of Debt 가 주요했습니다. 특히 Writ of Debt 는 이미 발생한 금전 채무를 받아내는 데 사용되었는데, 이는 미래의 약속에 대한 이행을 강제하는 현대적 계약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미래의 약속 이행을 법적으로 강제하는 것은 종교적 윤리의 영역에 가깝다고 여겨졌고, 커먼 로 법원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단순한 불이행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Contract 의 태동은 사실 채무 불이행보다는 약속 이행 과정에서 발생한 손해를 배상하도록 하는 소송 형식인 Assumpsit 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합니다.

 

영국 계약법

 

Assumpsit 라는 소송 형태가 발전하면서 Contract 는 비로소 미래의 약속 이행을 강제하는 법적 틀로 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Assumpsit 은 원래 상대방에게 맡겨진 일을 부주의하게 수행하여 손해를 입힌 경우에 적용되는 소송이었으나, 점차 약속 자체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경우에도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인 약인 Consideration 이 등장하게 됩니다. 약인은 Contract 를 단순한 도덕적 약속과 구분 짓고 법적 구속력을 부여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영국 계약법은 당사자 간의 합의만으로는 Contract 가 성립되지 않으며, 한쪽 당사자가 다른 쪽 당사자에게 가치 있는 무언가를 제공해야만 법적 효력을 가진 Contract 로 인정했습니다. 이는 공평하고 상호적인 교환을 통해 계약이 성립되어야 한다는 커먼 로의 실용적인 가치관을 반영합니다. 약인의 등장으로 Contract 는 비로소 대륙법계의 단순한 의사 합치와는 차별화되는 고유의 법적 영역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영국 계약법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서 Contract 의 개념은 더욱 명확해지고 현대화되었습니다.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의 발달은 계약의 자유와 예측 가능성을 법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에 법원은 Contract 의 성립 요건으로 청약 Offer 과 승낙 Acceptance 을 통한 명확한 합의를 강조했습니다. 당사자 간의 의사가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합치되었는지 여부를 중요하게 판단했으며, 계약 당사자의 주관적인 의사보다는 외부로 표출된 행위를 중심으로 계약 성립 여부를 판단하는 객관주의 원칙이 확립되었습니다. 또한 Contract 는 당사자 간의 사적인 약속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제3자를 위한 계약은 오랫동안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즉 계약 당사자가 아닌 제3자는 Contract 의 이행을 주장할 법적 근거가 없었습니다.

 

영국 계약법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사회적 요구와 공정성 문제가 대두되며 Contract 의 개념은 다시 한번 확장됩니다. 1999년에 제정된 제3자를 위한 계약법 Contract Rights of Third Parties Act 1999 은 오랫동안 고수되던 제3자 배제 원칙을 깨고, 계약서에 명시되거나 계약의 의도가 제3자의 이익을 위한 경우 제3자도 계약 이행을 주장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이는 Contract 가 단순한 두 당사자 간의 약속을 넘어, 계약을 통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기대와 이익까지 포괄하는 사회적 합의의 성격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공법 영역에서 발전해 온 금반언의 원칙 Promissory Estoppel 이 사법 영역의 Contract 에 영향을 미치면서, 비록 약인이 없더라도 상대방의 약속을 믿고 행동하여 손해를 본 경우 그 기대를 보호해야 한다는 공정의 원칙이 Contract 의 효력에 간접적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영국 계약법에서 Contract 라는 단어는 중세의 단순한 채무 관계에서 출발하여, 약인이라는 독특한 장치를 통해 법적 구속력을 확보하고, 20세기에는 계약의 자유라는 가치 아래 객관적 합의를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공정성과 제3자의 권리 보호라는 사회적 요구를 수용하며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Contract 의 역사는 곧 영국 법체계가 어떻게 실용성과 공정성을 결합하며 진화해 왔는지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계약법을 공부하는 것은 곧 인간의 상호 작용과 사회적 신뢰가 법이라는 틀 안에서 어떻게 자리 잡아왔는지 이해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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